사랑은 왜 불안한가
에바 일루즈 지음
이 책에서 저자 에바 일루즈는 우리나라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라는 소설을 분석하면서 현대의 사랑이 어떻게 사도마조히즘적 관계에 어떻게 반영되어 표현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나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SM에 대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의외로 SM 관계는 안전한 관계처럼 느껴졌다. 대개 SM 관계는 위험하고 불안하고 생각하는데, 이 관계는 철저하게 계획된 관계이며, 한계를 설정하고, 흥분하여 위험수위를 넘을 때 그것을 제지할 수 있는 신호가 있으며, 관계의 주도권은 돔(주인)이 지니지만, 돔의 한계는 철저하게 섭(노예)이 설정한다. 그리고 소위 '사랑', '섹스'에서 요구되는 '신뢰'가 이 SM 관계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반적인 섹스보다 더 불안하며, 더 긴장되지만, 더 안전하게, 더 신뢰하며... 이런 관계처럼 느껴졌다.
이 책에서 언급한대로, '고통과 아픔, 수치, 모멸감'을 쾌락으로, '권력욕'을 행사하되 그것이 상대방의 유희에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것, 그래서 외형적으로는 돔이 주인이지만 내용으로는 돔이 봉사자일 것 같다는...
- 나는 지배적인 힘을 발휘해 제도로 자리잡았다거나 문화매체를 등에 업고 주류로 치고 올라올 정도로 새롭게 퍼져나간 가치관과 태도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이 바로 베스트셀러라는 사실에 주목하려 한다.
- 내가 보기에 이 작품의 성공비결은 포르노에 가까운 내용에 있는 게 아니다. 현대 후기의 남녀관계가 지닌 특징이 이 작품의 사도마조히즘적 관계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어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는지 그 방식에 주목해야만 이 시리즈의 성공비결을 찾아낼 수 있다.
- 나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비교적 애매한 표현임을 잘 알면서도 골랐다. 어떤 책이 왜 베스트셀러가 되는지 그 원인을 짚어보기가 간단치는 않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베스트셀러가 다루는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가 고민하는 주제와 관련을 갖는다고는 확실히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회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 특정한 문제를 바라보는 두려움, 함께 흥분하며 설레는 상상력 등을 이야기 속에 녹여낼 때 베스트셀러의 바탕이 마련된다. 그래서 비록 어떤게 진정한 '공감'인지 그 기준을 정하기는 애매하지만, 분명 공감은 베스트셀러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 제도로 굳어진 갈등이나 모순은 방향성 상실을 불러일으키며, 이런 갈등과 모순을 명확하게 다룬 글은 대중적 인기를 얻는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덧붙여, 사람들로 하여금 새롭게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작품이라면 금상첨화다.
- '그레이 시리즈'에 담긴 것은 곧 에로틱한 판타지의 자기계발적 요소다.
- 상상력은 현실의 경계를 넘어갈 가능성만 제공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상상력은 현실을 회피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길도 제시한다.
-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소설이 상상력을 촉발한다는 주장은 상상력이 사회현실의 일부를 드러내는 동시에 피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을 어쩔 수 없이 확인시킨다.
- 이런 도구 상자를 이용하는 여성은 이른바 '꺼내 쓰는 거래'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꺼내 쓰는 거래'란 미국에서 문학을 연구한 여성 교수 루이스 로젠블랫의 표현이다. '뭔가 꺼내다 쓸 것을 찾으려는 동기를 가진 행동'이 독서라고 로젯블랫은 주장한다. 대다수 독자는 교훈적 목적 없이 쓰인 소설 문학을 읽으면서도 어떻게든 쓸모있는 실질적 충고나 특별한 지혜를 '끄집어내려' 한다. 이를 두고 웨인 부스는 허구가 아닌 실제 인생으로서의 '유용한 옮김'이라 불렀다.
- 한마디로 '그레이 시리즈'는 섹스와 낭만적 욕구를 충분히 누리고 싶은 인생을 위한 처방전이다. '그레이 시리즈'는 사랑과 섹스가 처한 한심할 정도로 비참한 상태를 꼬집는 촌평인 동시에, 우리 인생을 개선하기 위해 낭만적 상상력과 자기계발 지침을 하나로 묶어낸, 독특한 장르문학의 하나로 읽어야 한다.
- 19세기의 소설이 주로 처녀가 사랑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을 그렸다면, 오늘날의 여성 독자를 겨눈 대중소설은 결혼 생활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성생활이 이뤄지지 않거나, 결혼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적극적 성생활을 한다 해도 자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라고 부추긴다.
- 아무튼 섹스는 단순히 벌거벗은 두 몸이 마주치는 것 그 이상이다. 심지어 어떤 것이 경계를 넘어가는 섹스인가 하는 문제조차 사회가 정의한다. 결과적으로 경계를 넘어가는 행위는 그 사회가 내세운 규범과 맺는 관계에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섹스는 언제나 사회적이다. 섹스가 '자유'에 따른 것일 때조차 사회성은 더욱 도드라진다. 내가 행사하는 자유는 상대의 자유를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이 소설은 섹스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다양한 형태의 불안을 언급하면서, 그 분명한 해결책을 낭만적 사랑에서 찾는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섹스를 요구하는 관계가 아닌, 거꾸로 섹스로부터 사랑이 우러나오는 관계를 목격한다.
- 주체에게 섬김을 받을 때에만 주인은 자신의 권력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 현대 사회는 인정이 결핍 혹은 다른 사람이 우리의 자존감을 강화해준다는 느낌의 만성적 결핍이 생겨나도록 조장한다.
- 마조히즘은 아픔의 비합리적 요구와 이 아픔을 쾌락으로 바꿔낼 줄 아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 'BDSM'은 이성애 관계에서 일어나는 투쟁이 처한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일련의 상징적 전략을 제공한다.
- 오늘날 이성애 섹스는 역할 분담의 불분명함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남성과 여성은 각기 자신의 정체성 특징을 어떻게 교환해야 좋을지 몰라 전전긍긍한 나머지 안정적 결혼 생활이 힘들어졌다. 오늘날 남성과 여성이 각자 자신의 성 정체성을 놓고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그레이와 아나는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각자의 성적 특성을 교환하는 법을 터득한다.
- 'BDSM'은 이 싸움에 흥미로운 반전을 선물한다. 유희하듯 즐기는 섹스는 심적 고통을 몸의 확실한 아픔으로 옮겨놓으며, 이 아픔을 즐거운 놀이와 욕구, 쾌락과 뒤섞어놓음으로써 아픔에 명확한 심리적 역할을 부여한다. 'BDSM'은 아픔에 형식을 제공하며, 이를 미화함으로써 고통 체험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통제할 수 있게 해준다.
- 역설적이게도 'BDSM'에서 연출되는 것은 아픔 그 자체라기보다는 아픔을 쾌락으로 바꾸어내는 것, 불명료한 게 아니라 정확히 윤곽을 그려낼 줄 아는 능력이다.
- 나는 사도마조히즘을 계몽의 일부라고 본다. 사도마조히즘은 확실성을 추구하는 문제의 내재적 해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대의 도덕이 애매모호함, 불확실성, 불특정성이라는 문제, 사실 이모든 것은 질서정연한 도덕적 우주의 와해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아무튼 이 문제로 현대의 도덕이 골치를 않는다면, 문제의 내재적 해결책은 스스로 빚어낸 확실성에 기초해 행동할 때에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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