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다. 언제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고민하며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멘털이 박살 나고 자존감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3월 내내 뜬눈으로 지새운 날이 잠깐이라도 눈 붙인 날보다 많다. 겨우 잠든 날도 한두 시간 있다가 화들짝 깨버리고는 했다. 이 얘기를 이제는 해보려 한다.
상사에게 처음 얘기를 들은 것은 2월 말, 인사팀에게 제대로 통보받은 것은 3월 초. 요즘 CJ ENM에 불고 있는 감원의 칼바람이 계열사에도 불어닥친 것. 기준도 제멋대로고 방식도 제멋대로다. 계열사 전배를 알아보자 했지만 다들 잘려나가는 마당이라 어차피 못 믿을 소리였다. 3월까지만 출근하는 대신, 3개월간 재직상태를 유지해 주는 조건이 주어졌다. 이외에 소소한 위로금과 퇴직금을 준다고 했다. 재입사 기간은 쳐주지 않으니 1년밖에 다니지 않은 나의 퇴직금이야 푼돈이고...
잠을 거의 못 자는 3월 내내 엉망이라, 매일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장하다 싶은 상태였다. 셈이 빠른 사람이라면 후다닥 이력서 업데이트 해서 뿌려놓고 여기저기 쑤셔보고 할 텐데,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는데, 작년 우리 팀 성과 중에 내가 맡은 통신사 제휴가 거의 유일하게 유의미했는데, 심지어 더 잘해보겠다고 전셋집까지 회사 앞으로 구해놓은 마당에. 이런 억울함부터 시작해서 오만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https://blog.kakaocdn.net/dn/Bsxhy/btr8xN7JrXM/XIkakMmckCXOCtaECldei1/img.jpg)
나만 믿고 있는 가족에게는 도저히 말 못 하겠더라. 인사팀한테도, 직원 할인카드 3개월은 더 쓸 수 있는지부터 물었다. 어머니가 알면 바로 머리 싸매고 드러누우실 거라 그 걱정이 앞섰다. 원래 같으면 신나서 3월 초에 부리나케 인테리어까지 싹 끝냈을 새 집도, 오늘 새벽에야 겨우 박스 다 풀고 사람 사는 집처럼 만들어놨다. 회사 앞인 것 말고 아무런 메리트가 없는 서울 끝 상암동 전셋집이 예뻐 보일 리가 없었다.
대기업 연봉이라고 할 수 없기로 유명한 CJ에서 시작해 해외까지 다녀오며 10년 사이에 몸값을 세 배 이상 올려놨다. 방송부터 웹툰, 잠깐 머물렀던 광고, 그리고 OTT까지, 당대 핫한 콘텐츠만 골라가며 도전해 결국 해내면서 커리어를 예쁘게 만들고 있었다. 언제나 무엇보다 일이 우선이고, 와다다 달려서 성과 내고 인정받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타입이다. 우울할 때면, 오히려 뭔가를 미친 듯이 해서 마음에 들게 딱 내놓아야 기분이 풀리는 사람인데, 그 모든 게 12년 차를 앞둔 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내가 능력이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지금 CJ ENM과 계열사에서 20% 감원까지 얘기가 나오고 있고,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비슷비슷한 회사에 이력서를 집어넣겠지. 이미 헤드헌터들은 ENM 이력서 너무 많아서 경쟁력 떨어진다는 얘기를 하는 판이다. 게다가 나는 경력에 비해 몸이 최소 한두 단계는 더 무겁다. 이제 그 이상으로 후려쳐질 각오도 해야 한다. 그나마도 데려간다면 말이지. 내가 씨발 어떻게 올려놓은 연봉인데, 하는 것도 배부른 소리일지 모른다.
알음알음 사람들을 만나가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워낙 실패 없이 살아온 인생이라 이번 일에 이렇게까지 취약한 것도 맞고, 10년 넘게 달렸으니 이 김에 유급 휴가다 생각하고 쉬어가는 것도 좋고, 40대에 들어서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는 게 인생을 좀 더 넓게 보며 점검해 보라는 계시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우연히도 비슷한 처지에 놓인 한 친구는 이런 얘기를 했다. ‘무너진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냥 쌓다 보니 힘들지만 재밌어서 쌓았던 탑이었을 뿐, 아깝지만 같은 곳이든 다른 곳이든 다시 또 해볼 수 있는 거 아닐까?’ 이 말에 처음으로 좀 많이 울었다.
아직도 내 상태는 엉망진창이다. 어제도 아침이 다 되어서야 두세 시간 잠들었다. 출근하지 않은 이번 주 내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미친 듯이 잠만 자거나, 미친 듯이 날을 새우기만 했다. 그래도 드디어 집 정리도 어느 정도 마쳤고, 아직까지 들고 있는 회사 노트북도 주말까지는 이력서용 정보 정리해서 올려놓고 반납하려 한다. 할 수 있는 뭐라도 해봐야지. 결국은 보란 듯이 다시 일어나 달리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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