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활정보

김해 김씨 삼현파(金海金氏三賢派) 의 유래

by @블로그 2021. 2. 1.
반응형

1. 김해 김씨 삼현 파의 유래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신화에 의하면 42 년에 가락국의 북쪽 구지봉에 6 황금알이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반나절 만에 이 알이 모두 사람으로 변하여 6 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수로는 그 가운데의 한 사람으로 키가 9 척이나 되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가지게되었다. 그는 금관 가야국의 왕이 되어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 하였다. 인도 아유타 국의 공주인 허황 옥을 왕비로 맞았다고하며, 199 년까지 158년 사는 동안 그가 이룬 업적도 많았다고 한다.

 

2. 김해 김씨의 탄생설화

 

수로왕의 탄생설화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이 가락국을 창건한 것은 서기 42년 (후한 건무 18년)이다.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기 전에 가락의 땅에는 나라의 이름이나 군신의 칭호가 없었다.

다만 여러 부족들의 추장들이 백성을 통솔하고 있었으니 그들은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관. 유수간. 신천간. 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등 9간이었다.

서기 42년 3월 이들의 제삿날에 구지봉 산정에서 이상한 소리와 기운이 있어 2백, 3백여 명이 모였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노래하고 춤을 추며 기원을 하던 중 한 줄기 붉은빛이 하늘에서 내려 달려가 보니 해 같은 황금알 여섯이 금합에 담겨져 있었다. 다음 날 여섯 개의 황금알은 동자로 화했고 그 중 먼저 나온 동자 이름은 수로라 짓고 금합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김씨로 하였는데, 그가 바로 대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이다.

6개의 알에서 화생한 동자 중 첫 번째의 수로는 대가락국(가야국이라고도 함)의 왕이 되었고, 다섯 동자들도 각각 5가야의 국주가 되었으니 아라가야(현 함안지방), 고령가야(현 함양지방), 대가야(현 고령지방), 성산가야(현 성주지방), 소가야(현 고성지방)였다.

대가야(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황산(신라국경), 서쪽으로는 지리산, 남쪽으로는 남해에까지 이르러 지금의 경상도 일원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수로왕은 즉위한 6년 뒤 아유타국(지금의 인도)의 공주 허황옥을 비로 맞이하여 10왕자, 2공주를 두었다.

10왕자 중 장자인 거등왕자가 왕위를 잇고 둘째, 셋째 왕자는 모성을 따라 허씨로 계승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7왕자는 옥보선인을 따라 가야산에서 운상원으로 들어가 수도, 부처가 되었으니, 지금도 경남 하남군에 칠불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와 같은 허씨의 모성 계승을 우리나라 고대의 부계사회와 모계사회와의 접합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거등왕으로 이어지는 김수로왕의 후손들이 바로 김해김씨를 이룬다.

대가야는 532년 구형(구해)왕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여 나라가 망한다. 신라에서는 병합된 대가야 유민들의 민심 수습을 위해 구형왕에게 대등의 위를 주고 본국 김해를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즉 가야왕족은 신라의 신골신분에 포함되었다.

구형왕의 셋째 아들(족보에는 둘째 아들로 되어 있음) 김무력은 신라에서 벼슬이 각간에 이른다. 그의 손자 김유신이 태종무열왕으로 맺어지고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워 흥무대왕에 봉해짐으로써, 이 집안은 심라의 골품체제 내에서도 최고 가문의 하나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김해김씨는 김유신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김해김씨는 역사가 길고 자손이 번성한 만큼 후손들에 이르러 나누어진 분파도 1백48개에 이른다. 

 

3.김해 김씨의 시조 김수로(金首露)왕

 

수로왕이 즉위 7 년에 아유 타국 (현재 인도중부 지방의 고대 국가)의 공주인 허황옥( 黃玉, 33 ~ 189.3.1)을 왕비로 맞이하여 10 남 2 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로왕통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의 간곡한 요청으로 왕비의 성인 허 씨 (태인 허씨)를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7 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여 하동 7 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 이씨가 있으며 세성씨가 다같은 혈족 이라며 종친회도 '중앙종친회'로 하였다

가락. 김해 김씨의 중시조는 수로왕의 12 세손인 김유신 (金 庾信) 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신라의 장군이며 각간 (角 干) 인 김무력 (武力)이고, 아버지는 무열왕의 장인이며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김서현 (舒玄), 어머니는 진흥왕 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 만명 (万 明)이다.

 

 

4.김해 김씨의 계파

 

계파는 금녕군파를 비롯한 142가 있으며, 김유신의 직계 종 파인 3개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경파 (京 派 - 영견, 영서, 영정, 영순) : 고려의 김목경 (牧卿)을 중시조로한다.

사군파(四君派 - 극조, 완, 여수, 세기) :목경의 동생 김익경 (益 卿)이 중시조다.

삼현파 (三賢派 - 극일, 일손, 대유) : 김관(管)을 중시조로 한다.

 

5. 삼현파 (三賢派)의 내력

 

삼현파 (三賢派 : 판도 판서 공파)의 일세조 (- 世祖) 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 판서 (版图 判 书)를 역임하고 학교 (学校)를건설하여 유학(儒学)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孙) 극일 (克 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당시 왕 (정종으로 알고 있음)이 선생의 칭송을 듣고 충절과 효성의 상징으로 절효 (节 孝) 란 호를 하사 하였음.

극일 (克一)의 아들 맹(孟)은 세종(世宗)때 문과 (文科)에 올라 집의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 )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 ·기손 ·일손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 형제가모두 빼어 나서 "김씨 삼주 (金氏 三 珠)"로일컬어졌다.

1486 년 (중종 17) 식년 문과(式年 文科)에 급제한 일손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 (巨 儒) 김종직(金宗 直)의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 (金宏 弼) · 정여창 (邦汝 昌) 등과 친교를 맺었다.일손은 후사가 없었고, 일손의 장조카 (준손의 장남)이 삼족당 대유(大有) 선생으로서조선 시대 중기 문인으로서 널이 이름을 떨쳤고, 삼족당 문집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삼족당 선생은 동시대 巨儒 인 남명 조식선생과 동문 수학을 하였습니다.

 

 <삼현파 업적의 일화>

 

① 그의 현손 극일 (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② 1486 년 (중종 17) 식년 문과 (式年文科)에 급제한 일손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 (巨 儒) 김종직 (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官)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 (全罗司) 이극돈 (李克)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 [성종 실록(成宗实)]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 (李克數)이당상관 (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史草)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 제문 (意帝文 :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 (尹弼商)·한치형 (韩 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손은 중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종직의 조의 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화가되어 이른바 무오사화의 수괴로, 권오복 (五福)·권경유 ( 景 裕) · 이목 (李 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은 부관 참시 (棺析 :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 (中 宗 朝) 영의정 남 곤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 (김일 손의 호) 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 (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 (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 '라고 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도승지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③ 삼현 (三)의 한 사람인 대유 (大有)는 일손의 조카이며 준손의 아들이다. 무오사화 (戊午 士 禍)에 숙부(叔父) 일손이 참수 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中宗)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 (志 )로살았 으며, 3 개월 간의 칠원 현감 (漆原基)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 (淸道)의 운문산 (山) 속 삼족당 (三足堂)에서 73 세로 일생 (一生)을 마쳤다.

 

일손의 증손 언유는 고양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 (孝行)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 났으며 특히 송설체 (松雪体)에 능하여 공사 (公私)의 비 (碑) ·와 병풍 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의 아들 현성 (玄成)은 광해군 (光海君) 때 폐모론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 · 서 ·화에 모두능했다.

 

 

6.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파) 항렬표

 

(앞의 숫자는 파시조(판도판서 김관)의 ( )세, 뒷 숫자는 시조(김수로왕)의 ( )세) 입니다.

16-64 : 顯(현)ㅇ

17-65 : 再(재)ㅇ

18-66 : 國(국)ㅇ

19-67 : 昌(창)ㅇ

20-68 : ㅇ斗(두)

21-69 : 容(용)ㅇ

22-70 : ㅇ坤(곤) - (김0봉 조부)

23-71 : 鎭(진)ㅇ, 鍾(종)ㅇ (김0용 부)

24-72 : ㅇ洙(수), ㅇ泰(태) (김0재 본)

25-73 : 相(상)ㅇ, 東(동)ㅇ (김0재 자)

26-74 : ㅇ煥(환), ㅇ熙(희)

27-75 : 奎(규)ㅇ, 基(기)ㅇ

28-76 : ㅇ錫(석), ㅇ鎬(호)

29-77 : 洛(락)ㅇ, 永(영)ㅇ

30-78 : ㅇ柱(주), ㅇ植(식)

31-79 : 熹(희)ㅇ

32-80 : ㅇ在(재), ㅇ壎(훈)

33-81 : 錡(기)ㅇ, 善(선)ㅇ

34-82 : ㅇ洪(홍)

35-83 : 東(동)ㅇ

36-84 : ㅇ夏(하)

 

 

 

7. 삼현파의 삼현의 인물 - 김극일, 김일손, 김대유

 

김해김씨 삼현파의 삼현은 김극일, 김일손, 김대유를 가리키다.

김극일은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파)의 파조인 김관의 5세손으로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조모가 병으로 눕자 단지로 피를 흘려 넣어 그 병을 낫게 했다. 뒷날 조모가 세상을 떠나자 묘막을 지어 시묘의 예를 올렸고 조부상에도 조석으로 성묘하여 정성을 다하니 호랑이가 나와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세종 때 조정으로부터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그의 2남 김맹이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에 이르렀다. 맹의 세 아들 준손. 기손. 일손이 모두 당대의 문장으로 과거에 올라 ‘김씨삼주(金氏三珠)’라는 호칭을 들었다.

김준손은 직제학에 이르렀고, 김기손은 이조정랑을 지냈는데 이 가운데서도 탁영 김일손이 가장 돋보인다.

김일손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17년 생원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예문관에 등용된다. 여러 청환직을 거쳐, 뒤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으면서 관리들의 비행을 직필함으로써 관리들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었는데, 전라관찰사 이극돈에 대한 사초가 문제가 되었다.

 

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 이극돈이 당상관으로 참여, 사초를 살피게 되었다. 그때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말썽이 되었다. 이는 옛날 항우가 초 양왕을 죽인 중국의 고사에 비유,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한 글이다. 이극돈, 노사신, 한치형 등이 들고 일어나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김일손 등 일족은 참수당하거나 유배되고 만다.

탁영은 시가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탁영집’이 전한다. 이 시문집은 초간연대는 미상이나 1669년에 중간되었다. 1-4권에 시문이, 5권에는 습유가, 6권엔 행장. 묘문. 제문. 사향에 관한 기술 등이 실려 있다. 중종반정 후에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목천 도동서원, 청도 자계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그의 형 동창 김준손은 호남에 유배되었다. 김준손의 아들 삼족당 김대유는 무오사화로 숙부 김일손이 사형되고,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에 풀려나왔다.

다음해 진사가 되고 전성서직장을 지내다가 1519년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 호조좌랑, 칠원현감 등을 역임했다.

 

이해 칠원군수를 지내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없어지자 고향인 청도 운문산에 은거하며 유유자적 시서로 만족했다.

그의 호 삼족당은 60을 살았으니 나이도 족하고 벼슬도 족하고 의식주도 족하다 하여 지어진 것이었다. 뒷날 남명 조식은 묘지에 짓기를 “기개가 세상을 덮을 만하던 영웅이 이제는 없어졌으니 아아 애달프다. 내가 일찍이 남을 보증한 적이 없고 천하의 선비로 인정하는 이는 오직 공 뿐이다”라고 했다.

김관 은 판도판서공파의 파조다. 일찍이 벼슬이 판도판서. 국자사에 이르렀는데, 충선왕 때에 누차 부도(불교)를 배척하고 학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시키자고 상소하였다. 고려말 불교 배척에 앞장섰던 유학자 중의 한명 인 셈이다.

 

8. 김해김씨의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국내에서 본관은 김해이고 성씨는 김씨인 씨족은 둘이다. 사성 김해 김씨까지 포함하면 셋이다.
가야계 김해 김씨, 신라계 김해 김씨, 사성 김해 김씨 순으로 현재까지 이어진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김해김씨 삼현파 항렬표


《사또 박눌 이야기》

반응형

댓글